위기의 한국 민주주의… 시민이 촛불 대신 실권 쥐어야[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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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민 없는 민주주의
정병설 지음│문학동네
거리로 나와 구호 외치는 시민
건강한 참여민주주의 아냐
선거 외엔 별다른 권력 없어
모이고 흩어지기만 반복할뿐
추첨·선거로 사법권까지 가진
로마 공화정처럼 제도 바꿔야
게티이미지뱅크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져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나라의 통치를 위임받은 대통령이 절차도, 요건도 갖추지 못한 채 비상계엄을 선포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군사 통치를 들여오려다 헌법 위반으로 탄핵돼 파면당했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법을 멋대로 농락한 데 대한 반성도 사죄도 없이 ‘계몽령’ 같은 궤변을 늘어놓아 국민 분노를 유발 중이다. 시민들이 목숨 바쳐 지키고, 촛불 들어 살려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매번 파탄 지경에 이르는 걸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왜 늘 제왕적 대통령제는 반복되고, 권력 균형은 위태로우며, 선거는 사람을 제대로 가려 뽑지 못할까?
이 때문인지 요즘 주변에는 민주주의 공부에 몰두하는 이들이 많다. 직업과 전공에 상관없이 책들을 읽으면서 민주주의의 올바른 작동법을 고민 중이다.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의 ‘시민 없는 민주주의’도 그중 하나다. 이 책은 냉정한 현실 인식과 이론적 공부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와 미래를 탐구하고 고민하는 지성의 에세이다. 저자의 전공인 조선 시대 지식인들은 시대 현실을 진단하여 문제를 파악하고, 대책을 수립해 제언하는 글들을 수없이 써냈고, 서양에서는 루터에서 시작해 로크와 몽테스키외를 거쳐 루소와 볼테르에 이르기까지 자기 시대를 통찰하는 에세이들을 출판하곤 했다. 이 책은 이러한 지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저자는 100여 권의 책과 70여 편의 논문을 살피고, 정치학자, 법학자, 시민운동가 등 전문가 자문을 얻어서 이 책을 완성했다.
이 책의 밑바탕엔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한 근원적 진단이 놓여 있다.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촛불 들고 구호를 외치는 현상은 참여민주주의의 건강성을 보여주기보다 제도적 후진성을 보여주는 패배의 증거란 인식이다. 19세기 말 전국 각지의 동학 농민 1만여 명이 종로 거리에 모여 ‘나라님’에게 호소했듯, 현재도 선거 외엔 별 권한이 없기에 시민들은 거리에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묻는다. ‘주인인 국민이 왜 거리로 나와서 탄핵을 외치며 호소해야 하는가?’ 대통령은 명령 하나로 일상을 위협하고, 사법부는 문서 몇 줄로 상식을 파괴하는데, 시민에겐 이들을 바로잡을 실질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국민을 국가의 실제 주인으로 만들고, 시민에게 실권을 부여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재설계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베를린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겪은 경험이 저자의 민주주의 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시민들이 나누어서 농사짓는 공공 텃밭 클라인가르텐(Kleingarten)은 땅값과 관계없이 어느 동네에나 있고, 민간 임대주택을 정부에서 시세보다 싸게 강제 매입해서 시민에게 싸게 공급하는 안건에 대해 국민표결을 통해 통과시켰다.
베를린이 경제적인 이득이나 시장 논리보다 시민 인권과 삶의 질을 이렇듯 우선할 수 있는 건 일반 안건에 대한 직접적인 시민 참여가 가능한 까닭이다. 시민들을 판단 능력 모자란 인간, 명령에 따라야 하는 노예 같은 존재로 보면 주권자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그럴 때 현재 한국처럼 소수 엘리트에게 주요 사안에 관한 판단을 맡긴 채, 속수무책 그들의 선의와 현명함을 기다리는 ‘시민 없는 민주주의’로 전락한다. 그러나 엘리트 또는 전문가 민주주의가 얼마나 우리를 자주 배신해 왔던가.
이렇듯 시민들이 자기 삶의 운명을 결정 못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모든 시민을 평등하게 보고, 추첨과 선거를 통해 행정권뿐 아니라 사법권까지 보통 시민들이 진행했던 아테네 민주주의나 로마 공화정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시민 판단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이를 위해 일본의 검찰심사회, 대만의 국민 법관, 미국의 배심원제 등에서처럼 시민들이 직접 자유롭게 의견을 펼치면서 기소하고 재판할 권리를 누리고, 명예훼손 같은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요건을 최소화하도록 헌법을 고쳐야 한다.
우리에겐 가혹한 신분적 차별 속에서도 평등을 인식하고 인간다운 삶을 고민했던 동학 같은 전통이 있었다. 우리 시민들은 이미 공동체 주인으로 자유롭게 발언하고, 중요 사안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릴 만큼 성숙해 있다. 이에 걸맞게 헌법을 개정해 시민의회, 추첨제 등을 도입하여 시민들이 진짜 정치와 사회의 주인이 되는 나라를 이룩할 때가 되었다고 저자는 열정적으로 제안한다. 이러한 저자의 논의를 발판 삼아 다음 대통령 임기 안에 시민 열의를 모아 반드시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264쪽, 1만7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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